박범신의 소설 ‘은교’
- 노시인과 제자, 그리고 한 소녀의 기이한 삼각관계
‘해피엔드’로 필모그래피의 첫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랑니’ 라는 독특한 드라마로 관객에게 건재함을 알렸던 정지우는 ‘모던보이’라는 납득 불가능한 전작으로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줬었죠. 그래서 정지우 감독이 신작 은교를 어떠한 마음으로 만들었을지 기대가 됩니다. 동지들이 이글을 읽고 있는 시점에는 물론 은교가 개봉을 하고, 뿐만 아니라 흥행의 향방도 가려져 있을 듯 하지만 제가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아직 개봉 전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은교는 박범신의 동명 장편소설이 원작입니다. 저는 박범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작가의 소설은 그 나름의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은교’는 노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 그리고 어느 소녀 한은교의 삼각관계를 다룬 소설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의 삼각관계라면 은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갈등이 주제일 터이지만 은교의 삼각관계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위대한 시인이자 평생을 문단의 거두로 살아온 문학적 카리스마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70대의 노시인 이적요는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뛰어든 은교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동경을 가지게 됩니다. 그의 애제자이자 스승의 문학적 성취를 존경하는 아들 같은 제자 서지우는 자신의 평범한 문학적 재능에 대한 열등감만큼이나 스승의 천재성을 욕망하고 동경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적요는 자신이 은교에게 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제자 서지우의 젊음과 육체성을 욕망하고 동경합니다. 그래서 ‘은교’는 한 여자아이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질투의 삼각관계이면서 두 남자의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는 배배꼬인 갈망에 대한 이야기이죠.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은교’는 어느 위대한 노시인 이적요가 우연히 알게 된 한은교라는 소녀에게 집착해 평생을 자신의 아들처럼 살아온 제자 서지우를 살해하는 내용입니다. 단언컨대 위의 문장은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이적요의 질투와 욕망은 출구가 없는 미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셋 중 누구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죠. 또한 서지우는 열등감과 존경심이라는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 때문에 점점 더 이적요를 궁지로 몰아넣고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한 살해욕구를 오히려 부채질하는 아이러니한 과정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소설 ‘은교’는 오독하기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복잡한 시점과 다중으로 쌓여있는 갈등을 작중 화자라고 할 수 있는 변호사 Q에 의해 사실상 정리되어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어쩌면 조금은 과한 친절이라고 생각되는 변호사 Q의 역할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지만 어쨌든 박범신이 말하고자 하는 ‘갈망’이라는 존재론적 감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성공적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왜 정지우 감독이 어느 나이든 배우가 아니라 젊은 박해일을 캐스팅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가슴속에 한 마리 짐승을 키우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해사한 얼굴 속에 악마의 욕망을 갈무리한 살인의 추억속의 박해일을 기억합니다. 늙고 검버섯 핀 피부 아래에, 끓어 넘치는 갈망과 젊음을 간직한 노시인이라는 아이러니를 표현할 적합한 배우가 있다면 그것이 박해일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요.


